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굴 제국 (문단 편집) == 경제 == 샤 자한 재위기의 무굴 제국은 당시 최대의 경제대국이었다.[* 그러나 무굴 제국은 1위의 자리를 오래 유지하지 못했다. 당대 중국은 한창 [[명청교체기]]로 인하여 경제가 파탄난 상황이었고, [[청나라]]가 본격적으로 경제를 발전시켰던 반면에 무굴 제국은 [[샤 자한]] 사후 경제가 퇴보하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2위로 내려앉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굴 제국은 여전히 강성했으며, 1638년부터 1672년까지 약 30년에서 40년 정도는 세계 1위의 경제 대국이었다.] [[마우리아 왕조]] 이래 약 2,000여 년만에 전 인도를 정벌한 무굴 제국은 인도 전역을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어낼 수 있었고, 이 덕분에 인도 대륙의 경제 성장률은 수직상승했다. 1600년 당시 무굴 제국의 경제규모는 전세계의 22% 정도를 차지하면서 중국의 [[명나라]]와 근소한 격차로 2위의 대국으로 남았으나 1600년대 중반에 들어 자한기르와 샤 자한의 재위기에 본격적인 경제 진흥 정책들을 피면서 1630년대에는 마침내 제 1의 경제 대국으로 떠올랐으며 1700년까지도 전세계 GDP의 24%나 되는 비율을 홀로 차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18세기 내내 전세계의 공업 생산량의 25%를 생산해내고 있었으니, 일부 경제학자들은 무굴 제국의 이 시기를 [[산업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의 유럽의 경제 구조와 상당히 유사했을 정도라고 평하기도 했다. 무굴 제국은 셰르 샤 수르 시기에 그가 도입했던 화폐들을 그대로 이어서 도입하였다. 가장 대표적으로 은화인 루피(rupee)를 사용했으며, 동화인 댐(dam)을 사용하기도 했다. 가장 대중적으로 많이 쓰이던 화폐는 댐이었으며, 악바르 초기에는 1루피가 약 48댐 정도였다. 그러다가 점차 대포 주조 등 구리의 수요량이 많아지면서 댐의 가치가 상승했고, 1580년대에는 1루피가 38댐 정도로 환산되었다. 이후 제국 정부에서 은화인 루피를 대거 발행하면서 나중에는 댐 대신 루피가 가장 대중적인 통화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반면 댐의 가치는 지속적으로 상승했고 자한기르의 재위기에는 1루피가 28댐 정도였으며 1660년대에는 16루피 수준으로 그 가치가 급격하게 높아졌다. 한편 무굴 제국의 동화는 그 순도가 매우 높아서 순도가 96% 밑으로 잘 떨어진 적이 없었으며 1720년대까지도 질적 저하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신뢰성이 높았다고 한다. 무굴 제국은 도로 확충을 통한 상업 장려 정책을 펴기는 했지만 일단 근본적으로 완벽한 농업 국가였다. 무굴 제국의 세수 75% 가까이가 농민들에게서 걷혔으며 이때문에 역대 황제들도 농업에 많은 신경을 썼다. 주로 밀과 쌀, 보리 같은 기본 주식용 곡물들이 가장 많이 재배되었으며, [[목화]]와 인디고[* 청색 염료의 재료가 되는 식물], 마약 겸 약재로 쓰였던 [[아편]] 등 상품 작물들도 많이 길러 팔았다. 또한 17세기 중반에는 [[북아메리카]]에서 들여온 [[담배]]나 [[옥수수]] 등도 기르기 시작했다. 무굴 제국은 샤 수르의 정책을 본받아 농지 개혁을 실시했고 농민 공동체를 만들어 수확량에 따라서 정부에서 성과급을 지급하게 하는 등 농민들의 효율화에 애썼다. 또한 수로망을 확충하여 전국에 저수지와 관개도를 파내었고, 덕분에 인도의 토지 생산성은 이전의 몇 배로 폭증할 수 있었다. 특히 [[악바르 대제]]는 이전까지 인도에서 흔한 조세 방식이었던 공납과 공물을 폐지하고 대신 정부에서 발행한 화폐로 세금을 내도록 하는 개혁을 펼쳤고, [[사탕수수]], 아편, 솜 등 수익성이 높은 생산물에 대한 세금을 일부 감면해주면서 공급량을 늘리고자 하기도 했다. 게다가 정기적으로 토지조사를 실시하여 토지들을 재측량하였으며 황무지를 개간한 농부들에게는 일정 기간 조세를 면제해주는 등 새로운 농지 개발을 장려하기도 했다. 이같은 농업 장려 정책을 통한 폭발적인 경제 성장은 최소한 [[아우랑제브]] 황제 시기까지 쭉 이어졌으며 덕분에 인구도 크게 늘 수 있었다. 당대 무굴의 농부들은 동시대의 타국 농부들에 비하여 농업 기술도 뛰어났다. 기본적으로 [[파종]] 기술이 심지어 동시대의 유럽 농노들보다도 더 우위에 있었고, 동아시아나 유럽에서는 한 사람이 보통 하나의 작물만을 길렀던 것에 반하여 한 사람이 여러 개의 작물들을 동시에 기르기도 했다. 게다가 담배나 옥수수와 같은 새로운 작물들을 해외에서 수입하여 빠른 속도로 개량, 확산시키는 등 신품종에 대한 적응력도 굉장히 좋은 편이었다. 이렇게 우수한 기술들을 가지고 있던 농부들의 막강한 생산력 덕에 전성기 시절 무굴 제국의 식량 가격은 타국에 비하여 굉장히 안정적인 편이었고, 식량 걱정이 없어지자 직물 산업 같은 부가적 산업들이 번창하고[* 벵골 지역을 중심으로 한 직물 산업은 당시 무굴 제국 최대의 산업이었다. ] 무역이 활성화되면서 이 시기의 무굴 제국은 중국을 제치고 세계 제일의 경제대국으로 떠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경제학자 임마누엘 왈러스타인의 연구에 의하면 17세기 시절 전성기의 무굴 제국의 농업 생산성은 이미 타 아시아 국가들과 유럽을 압도하고 있었으며 기근과 약탈로 인해서 생산력이 크게 떨어졌던 [[인도 제국]] 시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고 한다. 덕분에 당시 남인도 지방의 밀 값은 영국과 비교했을 때에 절반 수준이었고 가장 부유했던 벵골 지방의 밀값은 3분의 1도 안됐다. 이는 인도 면직물들의 저렴한 가격으로 이어질 수 있었고,[* 식량 가격이 워낙 싸지면서 사회가 안정되자 이전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면직물들을 팔아도 먹고 살 수 있었다.] 무굴 제국의 면직물들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게 된다.[* 물론 이는 [[산업 혁명]] 이전을 기준으로 한 이야기다. 산업 혁명 이후로는 인도 역시 영국의 방직 기계들이 뽑아내는 엄청난 양의 면직물들을 감당하지 못했다.] 이러한 수공업 경제에는 인도의 전통적인 카스트 제도도 어느정도 기여했다. 영국식 4단계가 아니라 전통적 카스트는 정교한 사회적 분업체계인데, 모든 사람들이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자신의 역할을 받아들이고, 어릴때부터 그 기술만 갈고닦으니 수공업 장인들의 기술력이 사회적 분업과 맞물린 것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mughalstreet.jpg|height=28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stateentrydelhi.jpg|height=280]]}}} || || '''{{{#FFF 1700년 벵골의 시가지}}}''' || '''{{{#FFF 1700년 델리의 개선식 모습}}}''' || 무굴 제국 전체에서 가장 부유했던 곳은 바로 [[벵골]] 지방을 다스리는 [[벵골 수바]]였다. 벵골 지방은 무굴 군대가 1590년대에 정복한 이후 1757년에 [[영국 동인도 회사]]에게 넘어가기 전까지 최고의 경제적 전성기를 누리며 한때는 홀로 제국의 세수 절반을 감당하기도 했다. 쌀, 비단, 면직물 등 온갖 상품들을 쏟아내었으며, 유럽으로는 질산칼륨, 인도네시아로는 [[아편]], 일본과 네덜란드에는 비단을 수출했고, 그 외에도 중국이나 페르시아 지방과도 활발히 거래를 트고 번영하던 곳이었던 것이다. 특히 악바르 황제가 벵골 지역의 정글들을 개간하여 농경지로 바꾸고 [[수피즘]] 신자들을 데려와 이를 가꾸도록 하면서 식량 생산량이 폭증하면서 벵골은 완벽한 제국의 경제 중심지로 변모할 수 있었다. 벵골 지역에서는 소금, 과일, 술과 같은 식료품 생산도 꾸준하게 이루어졌으며, 왕실에 납품하는 용도의 최고급 카펫이나 [[태피스트리]]들도 바로 이 곳에서 만들어냈다. 벵골 지방은 이같은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황제로부터 상당한 자치권을 얻어내는 데에 성공했고, 벵골의 나와브[* 무굴의 총독 비슷한 관직]가 독자적으로 서양의 거래소와 무역소들을 연이어 개설하면서 서구와 엄청난 양의 교역을 하며 세계 무역의 중심으로 자리잡기도 했다. 다만 영국이 인도를 장악한 이후 지나친 수탈을 벌이며 경제력이 급강하했고 [[벵골 대기근]] 등 역사에 기록될 만한 재앙들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벵골의 경제력 위상 역시 추락하였다. 참고로 무굴 제국의 1600년 기준 1인당 GDP는 1990년대 달러화 기준으로 약 682달러 정도였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무굴 제국의 규모가 최대였던 1650년대에는 오히려 1인당 GDP가 638달러로 하락하였으며, 이후 무굴 제국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경제가 파탄났던 1750년대에는 573달러까지 하락했다. 이후 인도의 GDP는 무굴 멸망 직전인 1801년에는 569달러까지 하락했고 영국의 식민지배 초기에는 510달러까지 추락하는 등 난맥상을 보이다가 1870년대에야 겨우 520달러대를 회복하는 등 처참한 지수를 내었다. 참고로 [[영국]]의 1600년 기준 1인당 GDP는 1,123달러였고, 1750년에는 무려 1,710달러로 훌쩍 뛰어오른다. 그리고 산업 혁명이 본격화된 이후인 1870년에는 3,657달러를 찍어버리는 등 인도를 완전히 압도하게 된다. 다만 이를 그대로 믿으면 안되는 것이, 이건 그냥 명목상으로 환산한 것일뿐 PPP기준으로 재환산하면 무굴 제국의 GDP가 조금 더 올라가기는 할 것이다. 물론 절대적으로 보았을 때에 영국보다 전반적으로 빈곤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